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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캐나다 요리사의 삶

by jlee군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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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좋아 어릴 때부터 요리를 배우고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꿈이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적 외국으로 날아가
캐나다에서 요리사로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


 

베이컨과 계란 사진


어릴 때부터 음식을 만들어
엄마아빠를 즐겁게 하는 것이 좋았다.
그저 내가 만든 음식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으로
중학생 이라는 어린 나이에
조리 아카데미에 다니게 되었다.

조리 아카데미에 다니며
좀 더 요리다운 요리를 배우면서
'요리사'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TV에 나오는 콧대 높은 초록눈의
외국 스타 셰프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런 멋진
스타 셰프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요리사 꿈 사진


그렇게 시작된 한국에서 어린나이의
요리 생활은 녹록지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암울했던
한국의 요식업계의 상황은
나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외국으로
향하게 하였고 나는 비교적 영주권
따기가 쉽다는 캐나다로 곧 떠나게 되었다.

수월하게 캐나다 요리학과 컬리지를 졸업하고
드디어 나의 본격적인 요리 인생이 시작되었다.

컬리지 졸업 후 상당히 쉽게
(당시에는 꽤나 유명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직장을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때만 해도 내가 능력이 좋아서,
요리 실력이 남들보다 뛰어나서,
쉽게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식당 취직이 뭐라고.. 그 당시에는 내가 잘나서 취직이 쉬운 줄 알았다.)

동경하던 세계적인 스타 셰프처럼
나도 TV에 출연하고 수백 명의
부하 셰프들 위에 군림하는
그런 야심 찬 미래를 꿈꾸며
나의 열정과 몸을 하루 13시간씩
고용된 레스토랑에 갈아 넣고 녹여넣었다.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이 레스토랑에서 2년 안에 승진, 승진, 승진하여
요리사에서 수셰프 그리고 해드셰프가 된다.
그리고 5년 안엔 나의 몸값이 더 커지면서
5성 호텔 해드셰프가 되고 TV에도 출연해야지.

 


그 시절 나는 요리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 바보 멍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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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사진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나의 미래 계획은
당연하게도 실현되지 않았고,
그로부터 5년 뒤,
5성 호텔 해드셰프가 되겠노라는
다짐과는 다르게 일반 요리사에서 겨우 승진하여
주니어 수셰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한해 한해
여러 레스토랑들을 거치며 연차가 쌓이고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셰프만 돼도 조금은 꿈에 가까워지겠지?
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이게.. 맞나?"

라는 의심으로 점점 바뀌어 갔다.

피곤한 사진


좁고, 습기 차고, 더운 주방에
하루 13시간 자발적으로 갇힌 일상,
수셰프지만 월 260만 원 조금 넘는 월급,
세금 때면 쥐꼬리..
시간으로 따지면 최소시급도 안 나오는 현실.

아니, 그래도 수솁이면
한국 회사에선 과장급 아닌가..?

나는 문득 마흔살이 된 나를 상상해보았다.
마흔살의 나는 해드 셰프로써
주방을 지휘하고는 있었지만
그 장소 역시 좁고, 습기 차고, 더운 주방이었다.

자식은 있을까?
아니 결혼은 했을까?
하루 종일 주방에만 쳐 밖혀 있는데?

캐나다 요리사가 된 후
겨우 성사되었던 몇몇 연애들 모두
나의 비 정상적인 하루 스케줄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었다.

사실 여태까지 만났던 수셰프, 해드 셰프들의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이혼율을 보면 이미 답은 나와있었다.

젊을 때는 패기와 갈아 넣을 수 있는 체력이 있어
이런 비인간적인 일상을 버틸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과연 내가 서른, 마흔, 오십이 돼서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더 이상은 잡히지 않을
"스타셰프, 세계 최고의 요리사"
라는 꿈만 보고 달려갈 수는 없었다.

계속 꿈을 꾸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고됐고
바로 앞의 미래조차 보이지 않았다.

8년간 고된 노동으로 인해 나의 몸은
칼에 베인 상처, 불에 덴 상처, 미끄러져 생긴 멍
등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요리밖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바보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나를 힘들게 했다.

아마 그때쯤 일 것이다.
TV에서 봤던 고든램지와 같은 스타셰프는
세계 몇억 명 되는 수많은 요리사 중
'하나'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

카페알바 사진


나는 지친 나를 위해 일을 쉬며
인생 재정비 타임을 갖기로 했다.
돈은 벌어야 하니 서빙과 카페 알바를 병행하며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비록 알바도 쉽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던 요리사 일 보다는
훨씬 수월했고,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여유로웠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나를 가꿀 수 있는 여력이 생기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또한 생겼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의 아내를 만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시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아내 사진


혼자 하던 나의 고민을
아내와 같이 나누고 함께 고민하니
막막하기만 했던 미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세계 일류 셰프라는 꿈은 사라진지 오래,
그 자리에 이젠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미래의 내 자식들로 채워져 갔다.

짧으면서도 길었던 인생 재정비 타임을 끝내고
요리 말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을지,
아니면 아예 사업을 시작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가게 사진


많은 생각을 하였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내가 잘하고, 아니 사실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여태까지 안 쓰며 모아둔 돈을 갖고
조그마한 식당을 차리게 되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결혼 전 계속된 연애실패로
돈을 아낄 수 있었던 까닭에
쥐꼬리 만한 월급에도 불구하고
후미진 골목 아주 작은 식당
하나 정도는 차릴 수가 있었다.

가게를 시작하고 물론 처음엔 힘들었지만
남의 밑에서 몸이 갈리며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닌
온전히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해
땀 흘린다는 사실이 기뻤고,

가족이라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가게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단골도 생기고, 외진 골목이었지만
주위에 새로운 콘도와
비즈니스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아내와 꿈꾸던 두 아이가
적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갔다.

감사하게도 그 무섭던 코로나도 잘 넘겨냈고
마흔이 다 된 지금,
내 나름대로는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는
그 소박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가족 사진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 지금 내 옆엔
딸내미와 아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다.

물론 내일도 일찍부터 가게에 나가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해야겠지만,
지금 내 옆에 내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가끔은 생각한다.
어릴 적에 요리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목표했다면 지금 어땠을까.

조금 더 여유롭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까?
캐나다에 오기나 했을까?
한국에서 부모님과 내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잘 살지 않았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세계 일류 셰프의 꿈에서
비록 아주 작은 식당의 사장이 되었지만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내 가족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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